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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어베언

페어베언의 대상관계 이론

페어베언(W. Ronald D. Fairbairn)은 대상관계 정신분석 이론가들 중 단연코 돋보이는 이론가이다. 후에 서덜랜드(1970)는 발린트, 위니캇, 건트립과 같은 영국의 “중도파” 중에서 페어베언이야말로 가장 깊이 있고, 일관성이 있으며,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저자라고 평했다. 페어베언은 에딘버러 대학에서 심도 깊은 철학적 훈련을 하였으며, 일차 대전 후에 의과대학에 입학하였다. 사람들은 페어베언이 당시의 정신분석학 이론체계를 대담하게 재검토할 수 있었던 이유를 이러한 지적인 배경에서 찾는다. 그는 대상관계의 내재화에 기초한 발달모델을 구축하고, 전통적인 초심리학, 특히 본능이론을 대체할 수 있는 포괄적인 대상관계 이론을 확립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했다. 프로이트의 이중본능이론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 분열성 성격에 대한 설명, 분열성 과정과 히스테리성 해리간의 관계에 관한 서술 등은 그의 독창적인 임상적 공헌이다.

동기 이론

페어베언이 자신의 독자적인 이론을 구축하기 시작한 것은 프로이트의 욕동이론(리비도 이론)을 비판하면서부터이다. 욕동이론에 따르면 모든 정신적 기구가 활동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는 본능적 충동에 그 원천이 있다. 욕동이 적절한 만족을 통해 방출되지 못할 때 긴장이 형성되며, 정신적 기구는 이러한 긴장 해소를 향해 움직인다. 모든 충동의 궁극적인 목적은 쾌락으로 경험되는, 신체적 긴장의 감소이다.
페어베언은 임상장면 어디에서도 프로이트가 주장한 순수한 욕동을 발견할 수 없다고 반박한다. 그 대신 항상 발견하게 되는 것은 전이에서 재연되는 내재화된 대상관계의 맥락에서 이러한 욕동을 반영하는 정서가 활성화된다는 사실이다.
페어베언이 욕동이론은 비판하는 것은 다음의 두 가지 요지에서 이다.
첫째, 프로이트의 구조 모델에서 에너지가 구조로부터 분리되어 있다고 가정하면서 에너지를 가지고 있지만 그 목적이나 구조가 없는 원본능과 그 에너지를 사용하는 기제들을 갖는 자아를 서로 다른 기관으로 분리시켰다. 그러나 페어베언에 따르면 에너지를 구조와 분리시키는 이러한 사고는 19세기 물리학의 세계관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며, 20세기 물리학에서는 에너지와 구조를 동일한 것으로 본다. 이러한 구분은 실재를 반영하기보다는 단지 언어적인 조작으로 인해 생긴 착각에 불과하다. 자아 구조자체가 에너지를 가지고 있거나, 더 정확히 말하면, 에너지이며, 에너지는 처음부터 대상을 향하도록 구조화되어 있다. 그러므로 원본능에서 분리된 자아란 존재하지 않으며, 충동은 자아에서 분리되어 있지 않고 자아를 구성한다.
둘째, 리비도는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추구한다. 고전적인 욕동 구조 모델에서는 인간은 타자와 아무런 상관없이 태어난다. 유아는 자신의 긴장을 감소하기 위해 이차적으로 타인과 관계를 맺을 뿐이다. 이와는 달리 페어베언은 유아는 처음부터 타자를 지향하며, 인간의 근본적인 동기가 타자들과 접촉하고 그 관계를 유지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페어베언의 이론에서 쾌락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페어베언에 따르면 쾌락은 리비도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를 위한 수단일 뿐이다. 성감대는 해소되어야할 긴장을 낳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게로 가는 길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유아는 입을 통해서 그 첫 번째 대상인 젖가슴과 만나고 관계를 형성한다. 또 프로이트와 아브라함의 발달적 도식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발달을 의미하는 ‘성기적 우위성’은 페어베언에게 있어서 친밀한 상호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페어베언에게 있어서 성기는 아마도 타자와 생산적이고 밀접한 상호교류를 위한 가장 강렬하고 적절한 매개물일 것이다. 성감대가 대상관계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관계가 성감대를 결정한다. 리비도는 이용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통로, 즉 ‘저항이 가장 적은’ 성감대를 선택한다.
그렇다면 대상을 염두에 두지 않는 오로지 쾌락추구만을 목적으로 하는 순수한 향락주의적 행동에 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페어베언에 따르면 쾌락추구는 타자와의 즐거운 관계를 추구하는 근본적인 동기가 깨어졌을 때 발생하는 이차적인 결과이다. 쾌락 추구는 진정한 리비도적 목적을 성취하는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그 목적의 실패를 완화시키는 수단’으로서 기능한다. 후에 코헛은 그러한 순수한 쾌락추구적인 충동들을 ‘해체의 산물’이라고 불렀다.

페어베언은 내적 대상이라는 클라인의 용어를 사용하지만 다소 다른 의미로 쓰고 있다. 클라인은 좋은 대상과 나쁜 대상이 모두 내면화된다고 보았지만 페어베언에게 있어서 내면화되는 것은 나쁜 대상이다. 대상이 내면화되는 것은 대상에 대해 좌절스럽고 부정적인 경험을 할 때이다. 이를테면, 아이가 오랜 시간 동안 부재한 대상을 갈망한다는 것은 너무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아이는 이를 보상하기 위해 자신의 정신 내부에 내적 대상을 형성한다. 아이는 현실 속의 인간 관계가 방해받고 박탈당할수록 내적 내상들과의 관계에 몰두하게 된다. 이러한 내적 대상들이 증가함에 따라 자아가 분열된다. 왜냐하면 자아의 일부가 현실적인 외부 대상이 아니라 내적 대상과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그는 정신병리를 내적 대상으로 표현되는 과거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려는 자아의 노력으로 이해했다. 따라서 심리학이 ‘개인이 자신의 대상들과 맺는 관계에 관한 연구’라면, 정신병리는 ‘자아가 내면화된 대상들과 맺는 관계에 관한 연구’이다. 그의 이론에서 내적 대상들은 그 정의상 병리적인 것이다.

발달 이론

페어베언은 정서발달을 타인과의 관계가 자연스럽게 성숙해나가는 과정으로 보면서 세 단계로 나누었다: 최초의 유아적 의존 단계, 과도기적 중간 단계, 성숙한 의존 단계. 페어베언에 따르면 정상적 발달이란 본질적으로 유아적이고 의존적인 관계에서 성인의 상호적인 관계로 발달해가는 점진적인 과정이다.
페어베언은 초기 몇 개월 동안 유아는 어머니와 전적으로 융합된 것으로 경험한다고 보았다. 유아는 자신의 환경인 어머니의 신체로부터 자신이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전혀 상상하지 못한다. 페어베언은 이러한 상태를 ‘일차적 동일시’라고 불렀다. 이는 ‘주체와 분리되지 않은 대상에 대한 리비도 집중’으로 정의되는, 자아와 대상이 구별되지 않는 상태이다. 오늘날 사용하는 함입(incorporation)이라는 용어는 페어베언이 ‘이차적 동일시’라고 불렀던 것에 가까운데 여기에서는 자아/대상 간의 구분에 기초한 동일시가 일어난다.
이 시기의 유아는 함입할 수 있는 대상을 추구하며, 그 대상은 주로 젖가슴이다. 욕망하는 대상이 유아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할 때 유아는 불가피하게 좌절을 겪는다. 유아는 젖가슴이 나타나지 않으면 자신의 대상에 대한 사랑이 대상을 파괴했다고 느낀다. 유아는 대상의 함입을 추구하지만 그렇게 함으로 대상을 파괴한다는 갈등에 처한다. 이제 대상에 대한 욕망은 대상의 존재를 위협한다. 유아는 대상에 대한 갈망과 대상을 파괴할 것 같은 두려움 사이에서 갈등하며, 유아는 대상을 보호하기 위해 대상으로부터 철수한다. 그는 이러한 단계를 “분열적 자리(schizoid position)”라고 불렀다. 그는 분열적 자리가 근본적인 심리적 자리이며, 발달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좌절이 불가피하기 때문에 분열 현상이 보편적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분열적 자리의 과제는 대상을 파괴하지 않고 사랑하는 것이다.
중간 단계에서는 대상으로부터 자아를 분리시켜 나가는 단계이다. 페어베언은 유아가 항문기의 거절 기법(rejecting technique)을 사용하면서 중간 단계가 시작된다고 보았다. 구강기에 유아는 젖가슴을 추구하지만 항문기의 유아는 배변을 찾지 않는다. 유아는 거절 기법을 사용하여 자신과 대상을 구분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의 유아는 여전히 어머니에게 의존하는 상태이므로 새로운 형태의 갈등에 처하게 된다. 이러한 갈등은 내적인 측면과 외적인 측면으로 나타난다. 먼저 외부 대상과의 관계에서 대상에게서 너무 멀리 떨어지면 대상에게 버림을 받을 위험이 있다; 대상에게서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퇴행해서 대상과 동일하게 될 위험이 있으며 새롭게 싹트고 있는 자기감을 상실할 수 있다. 이러한 먹힐 것이냐 고립되느냐의 갈등은 중간 단계에서 유아와 외부 대상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특징적인 불안이다. 이는 분리-개별화 과정에 대한 말러의 관점과 유사하다. 한편 이 시기에 내적 대상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유아의 갈등은 방출(expulsion)과 보유(retention)의 갈등이다. 내적 대상을 방출함으로써 자율성을 획득할 수 있지만 공허감을 느낄 위험이 있다. 내적 대상을 보유함으로써 충만함을 얻을 수 있지만 대상과의 분리를 상실할 수 있다. 페어베언에 따르면 이 시기의 유아는 내적인 대상과 외적인 대상을 거절하고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중간 단계의 중요한 과제는 대상을 잃어버리지 않으면서 거절하는 것이다. 유아는 자기와 대상간의 분화를 유지하면서 의존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어야한다.
페어베언은 정서적으로 완전한 발달을 이룬 건강한 상태를 ‘성숙한 의존’이라고 불렀다. 상대방에게 일방적으로 의존하는 유아와는 달리, 건강한 성인은 상호의존적(mutual dependent)이다. 성숙한 의존은 분화된 개인은 분화된 대상들과 협력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점에서, 관계의 강조점이 받는 것에서 주는 것과 주고 받는 것으로 바뀐다. 이상적인 건강한 성인은 현실에서 다른 사람과 접촉하고 교환하는데 사용할 수 있는 충분한 에너지를 갖고 있기 때문에, 내적 대상들에게 보상적으로 애착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페어베언에 따르면 그와 같은 완전히 건강한 상태는 단지 이론적으로만 가능할 뿐이다.

정신의 구조화

페어베언은 유아가 자체의 에너지를 가지며, 현실의 외적 대상들과 관계를 추구하는, 통합되고 온전한 구조를 지닌 자아를 가지고 태어난다고 보았다. 만일 대상들과의 관계가 만족스러운 것이라면 자아는 온전한 상태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러나 외부 대상들과의 관계가 만족스러울 수만은 없고 불가피하게 좌절이 있기 때문에, 이에 따라 보상적인 내적 대상들이 발생한다. 이러한 내적 대상들의 증가는 자아의 분열을 가져온다. 이제 의식에서 떨어져 나가 내적 대상들과 관계를 맺는 자아의 일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내면화되는 것은 나쁜 대상이다. 페어베언은 이러한 내적 대상을 두 종류로 나누었다. 그 하나가 ‘흥분시키는 대상(exciting object)’이며, 다른 하나는 ‘거절하는 대상(rejecting object)’이다. 흥분시키는 대상은 실현성이 없는 약속을 남발하는 대상의 유혹적인 측면이 내면화된 것이다. 자아의 일부는 이러한 흥분시키는 대상을 동일시하면서 흥분시키는 대상이 약속하는 만족을 계속해서 갈망한다. 이러한 자아의 일부를 ‘리비도적 자아(libidinal ego)’라고 불렀다. 거절하는 대상은 대상의 박탈하고 주지 않는 측면이 내면화된 것이다. 거절하는 대상과 동일시된 자아의 일부는 어떤 접촉이나 만족에 대해서도 적대적이며 냉소적이다. 페어베언은 거절하는 대상과 관계하는 이러한 자아의 일부를 ‘반리비도적 자아(anti-libidinal ego)’라고 불렀다(초기에는 ‘내면의 방해자(internal saboteur)’라고 불렀다가 후에 이 용어를 바꾸었다). 한편, 만족스러운 대상의 측면들은 이상적인 대상(ideal object)을 형성하며 이것은 자아 안에 남게 된다(억압되는 것이 아니다). 이상적 대상과 관계하는 자아의 일부는 ‘중심 자아(central ego)’라고 불렀다. 중심 자아는 외부 현실 세계의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데 이용되는 자아의 일부이다.
리비도적 자아는 유아적 의존 갈망을 포기하지 못하고 그 희망들을 간직하는 희망의 저장소이다. 흥분시키는 대상이 약속했지만 충족시키지 못했던 희망들을 간직한다. 리비도적 자아는 현실의 어머니로부터 만족을 얻고 싶다는 갈망이 너무도 고통스럽기 때문에 내적 세계 안에서 흥분시키는 대상과의 합일을 갈망한다. 이 때문에 리비도적 자아는 흥분시키는 대상과의 관계 안에 남아 있으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실현되지 않는 약속일뿐이다.
반면 반리비도적 자아는 리비도적 갈망이 좌절된 결과 발생한 모든 증오와 파괴성의 저장소이다. 반리비도적 자아는 거절하는 대상에 애착을 느끼며, 자신을 박탈하고 주지 않는 어머니의 측면을 동일시한다. 반리비도적 자아는 약속해 놓고 주지 않는 흥분시키는 대상에게 격분한다. 뿐만 아니라 반리비도적 자아의 분노는 자신에게도 향한다. 왜냐하면 리비도적 자아는 흥분시키는 대상과 동일시된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반리비도적 자아는 어머니의 약속이 머지않아 성취될 것이라고 믿는 리비도적 자아를 증오한다. 반리비도적 자아는 내적 대상과 자아의 일부를 공격함으로 자기 파괴적이고, 자기 처벌적인 정신병리의 원인이 된다. 반리비도적 자아는 다른 사람들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의 적이다. 반리비도적 자아는 타자로부터 무언가를 얻으려고 하는 리비도적 자아를 증오하고 처벌한다. 또한 의미 있는 관계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타자들을 증오한다.
페어베언은 이상적인 대상의 내면화는 자신이 ‘도덕적 방어’라고 부른 이차적 발달의 결과로 보았다. 이상적인 대상을 내면화하는 것은 나쁜 내적 대상들이 활성화되는 것을 방어하기 위해서이다. 중심적 자아는 이상적 대상이 요구하는 이상에 맞추어 살면서 의식에서 떨어져 나간 분열된 자아들이 ‘나쁜’ 내적 대상들에 집중하지 못하게 한다. 이렇게 해서 중심 자아의 일부는 이상적 대상에 집중하고 나머지 중심 자아는 현실 세계의 외부 대상들과 관계를 맺는데 사용된다. 페어베언은 이러한 분열에 의해 형성된 자아 구조는 어느 누구에게서나 발견되는 ‘보편적인 심리내적인 상태’라고 보았다. 그러나 정신병리는 이러한 분열의 정도가 클 때, 분열된 자아의 부분들이 현실의 대상관계를 포기하면서까지 내적 대상들에 집착하는 데서 비롯된다.

페어베언이 가정하고 있는 ‘기본적인 심리내적 상태’로 가정하고 있는 중심적 자아, 반리비도적 자아, 리비도적 자아는 각각 프로이트의 자아, 초자아, 원본능의 삼중 구조 모델을 의인화(anthropomorphization) 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 될 수 있다. 그러나 두 모델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먼저, 중심적 자아와 프로이트 삼중구조 이론에서의 자아는 모두 현실지향적이다. 그러나 중심적 자아는 이상적 대상과 외부세계의 대상들과 관계를 맺는데 사용되지만 프로이트의 모델에서 자아는 그 자체로서 목적을 가진 기구가 아니며 단지 중재자로서 봉사한다. 리비도적 자아와 원본능은 모두 갈망과 원망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나 리비도적 자아는 대상과 관련되어 있으며, 약속은 하지만 만족시켜주지 않는 부모와의 초기 관계를 반영한다. 반면에 원본능은 그 정의상 구조도 방향도 가지고 있지 않다. 프로이트의 초자아와 페어베언의 반리비도적 자아는 모두 자기 처벌적인 정신 기능을 나타내는 내적 대상들이다. 그러나 초자아는 반사회적인 욕동 파생물들에 대한 사회적인 공격이며 본질적으로 도덕적인 반면, 반리비도적 자아는 도덕 이전의 것으로 거절하는 부모와 맺는 초기 관계에 의해 파생된 것이다.

프로이트의 욕동구조 이론에서 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원본능, 자아, 초자아라는 기능들 사이에서 이다. 자아는 본능적 충동을 만족시켜달라는 원본능의 요구와 내면화된 부모상들이 내린 금지를 따르라는 초자아의 요구와 외부 현실 세계의 요구들을 절충하고 타협한다. 페어베언의 모델에서 내면의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본질적으로 아동이 부모와 경험한 관계들로서, 리비도적 자아와 흥분시키는 대상, 반리비도적 자아와 거절하는 대상, 중심적 자아와 이상적인 대상 사이에서 일어난다. 고전적인 프로이트 모델에서 갈등은 본질적으로 본능적인 충동에서 비롯된다. 그 충동 중 일부는 부모와의 초기 관계에서 형성된 내적 표상들(초자아를 형성하는)에 의해 중재된다. 페어베언의 모델에서 갈등은 본질적으로 중요한 대상들의 특성에 대한 갈망과 동일시에 의해 발생한다. 이때 대상은 외부 대상일 수도 있고 외부대상을 통제하기 위해 내면화한 내적 대상일 수도 있다.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문제는 본능적 목적들이 서로 충돌할 때, 그리고 본능적 목적인 사회적 현실과 충돌할 때 발생한다. 페어베언에게 있어서 문제는 사람이 타자와의 관계에서 자신의 경험의 온전성과 전체성을 유지하지 못할 때, 또는 화해할 수 없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를 분열시킬 때 발생한다.

정신병리

페어베언은 넓은 의미에서 ‘유아적 의존기’의 정신병리와 ‘과도기적’ 단계의 정신병리를 구분한다. 전자에 해당하는 정신병리는 분열성 성격 장애와 우울증이며, 후자는 그가 공포증적, 히스테리적, 편집증적, 강박증적 ‘기법’이라고 부른 것을 포함하는 내적 대상과 외적 대상을 다루는 다양한 방법에 의해 특징지워진다.

페어베언에 따르면 분열성 성격은 유아적 의존기의 분열적 자리에 그 뿌리가 있다. 이 시기에 정서적으로 무감각하고, 침범적이며, 일관성이 없는 부모들은 관계를 맺으려고 하는 아이의 강렬한 욕구를 좌절시킨다. 이러한 좌절이 클 때 아이는 대상을 소유하려는 욕망이 커지고, 이에 따라 대상과의 접촉으로 인해 대상이 파괴될 것에 대한 두려움도 커져서 결국 정상적인 분열성 자리가 강화된다. 분열성 성격에서는 모든 리비도적 대상관계에 대해 갖는 극심한 공포와 그 공포의 표현인 중심 자아의 지속적인 분열이 발생한다. 분열성 성격에서는 리비도적 및 공격적 욕구를 심리내적으로 충족시킬 수 있는 내적 환상 세계 안으로 철수하여 중심 자아는 황폐해지고, 중심 자아의 정서적 능력이 전반적으로 약화되며, 외부 대상에 대해서는 은밀함을 유지하면서 미묘한 우월감을 느낀다. 이러한 황폐한 중심 자아는 공격적이거나 리비도적인 특성이 대부분 제거된 대상과 관련되어 있다. 전이에서 분열성 환자가 분석가와 단절되어 있거나, 감정이 결여된 환상으로 철수하거나, 환자 자신이 공허감과 허망감을 느낀다고 말하거나 분석가에게 이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환자가 분석가에 대한 자신의 총체적인 정서 관계를 방어적으로 분열시킨 결과로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중심에서 떨어져나간 이러한 관계의 조각들은 해리된 정서 경험에서, 환자 행동의 덧없고, 통합되지 못하고, 비언어적인 측면이 활성화되는데서, 다른 대상들에게로 전치되는데서, 그리고 환자의 꿈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분석가는 환자에게 이러한 자료를 분석해줌으로써 분석가에 대해 이상적이고 우호적이지만 거리를 두는 관계를 변형시켜나갈 수 있다.
페어베언은 다양한 형태의 신경증은 중간 단계에서 습득하게 되는 여러 가지 방어적 기법들과 관련이 있지만 그 뿌리는 분열적 자리(혹은 우울적 자리)에 있다고 보았다. 즉, 중간 단계에서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방어적 기법들을 사용하는 것은 그 이전의 유아적 의존기의 갈등이 충분히 해소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공포증적 기법은 외부 대상에게 먹힐 것이냐 고립될 것이냐의 갈등에서 어느 한쪽을 방어하려는 기법이다. 이를테면 광장공포증이나 어두움에 대한 공포증은 대상에게서 분리되는 것에 대한 불안을 방어한다. 반면에 폐소공포증이나 사회공포증은 대상에게 먹히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방어한다. 강박적인 기법은 함입한 대상을 내보낼 것이냐 보유할 것이냐의 갈등과 관련이 있다. 내적 대상을 내보내는 것은 내면이 텅 비워질 위험이 있으며, 대상을 보유하는 것은 너무 가득 차서 터질 가능성이 있다. 강박적인 상태는 내보낼 것이냐 보유할 것이냐를 결정하지 못하고 사고에 과도한 힘을 부여한다. 편집증적 기법은 수용하는 대상을 내면에 받아들이고 거절하는 대상을 외부에 두는 것이다. 이때 좋은 내적 대상은 나쁜 외적 대상의 공격을 받을까봐 두려워하게 된다. 히스테리 기법은 편집증적 기법과 정반대이다. 히스테리 기법에서는 나쁜 대상을 내면에 두고 좋은 대상을 외부에 둔다. 히스테리 상태에서는 외부대상을 부풀려 평가하면서 외부대상에게 거절하는 내부대상을 보상해주기를 요구한다.

페어베언은 피학적인 성향을 이전에 분열되어 내재화된 나쁜 대상관계가 전이에서 활성화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피학적인 관계에서는 반리비도적인 자아와 반리비도적인 대상 사이의 관계가 활성화될 뿐만 아니라 반리비도적 대상을 수정해서 미움을 사랑으로 변형시키려는 절박한 시도가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리비도적 대상과 관련된 리비도적 자아 쪽에서 수행하는 절박한 추구는 나쁜 대상과의 관계를 점차 완화시키고 좋은 대상관계의 측면과 종합해내기 위해서 나쁜 대상과의 관계를 활성화시키면서 나타난다.
페어베언에 따르면, 아동은 좌절을 주고 박해하는 대상이 지닌 나쁨을 스스로 떠맡는다. 그는 나쁜 대상의 내재화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악마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사는 것보다 하나님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죄인으로 있는 것이 더 낫다”(1943, p. 66). 따라서 나쁜 것은 부모가 아니라 아동 자신이다. 즉 나쁨은 아동 자신 안에 있다. 만약 자신이 나쁘지 않다면 부모는 자신을 사랑했을 것이다. ‘나쁨’이 현실의 부모에게 있다면, 아동은 자신이 상황을 개선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고통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나쁨’이 자신 안에 있다면, 그는 그 나쁨은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된다. 이러한 희망은 전이에서 활성화되는 피학적인 대상관계 안에 숨겨져 있다.

페어베언의 정신병리 이론은 프로이트가 ‘반복 강박(repetition compulsion)’이라고 불렀던 현상을 훌륭하게 설명해준다. 고통과 괴로움과 패배는 환자의 삶에 하나의 구조가 되어 반복해서 나타난다. 환자들이 고통을 반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프로이트는 이러한 현상을 초기에는 쾌락원리의 틀 안에서 설명하려고 하였다. 즉, 병리적인 고통은 금지된 원망들의 처벌을 나타내며, 그것은 원래 쾌락적인 것이다(피학주의). 1920년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설명이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고통스러운 초기의 경험이 반복되는 것은 쾌락원리 때문이 아니라 죽음본능 때문에 생긴 정신적 기능이라고 주장했다.
페어베언에 따르면, 이러한 반복 강박은 나쁜 대상에 대한 자아의 애착과 헌신 때문이다. 자아는 그러한 내적 대상들로부터 분리된다면 그때부터 자신은 완전히 홀로 남게 된다는 공포를 가지고 있다. 아이는 부모를 필요로 하며 그 때문에 자신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피학적인 형태로 통합한다. 현실에서의 관계가 불만족스러울수록 아이는 끊임없이 약속을 남발하지만 결코 지키지 않는 내적인 부모에게 매달린다. 환자들은 모든 것을 약속하지만 아무 것도 주지 않는 박탈자를 사랑의 대상으로 선택하거나, 사랑의 대상에게 자신의 내면의 박탈자의 모습을 투사한다. 흥분시키는 대상이 자신을 만족시켜 줄 것이라는 리비도적 자아의 갈망을 유지하기 위해 환자는 자신의 삶에서 실패를 반복한다. 그에게 있어서 성공은 흥분시키는 대상을 배신하는 행위이다. 환자들은 나쁜 내적 대상들을 배신하지 않기 위해 새로운 관계를 맺지 않는다. 그것은 환자의 삶의 건설적인 변화를 가로막는다. 그리고 분석상황에서 가장 강력한 저항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프로이트 이론에서 정신구조의 주요특징은 오이디푸스적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초자아를 내면화하는 과정에서 완성된다. 이와 달리 페어베언은 ‘보편적인 심리내적 상태’의 본질적인 측면들은 출생 후 어머니와 맺는 초기 관계에서 확립된다고 주장하였다. “프로이트는 정신병리의 궁극적 원인을 오이디푸스적 상황에서 찾았으나, 정신병리의 궁극적인 원인은 유아적 의존의 상황에 있다”(1944, p.120).
페어베언에게 있어서 오이디푸스적 상황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초기의 이자 관계가 삼자 관계로 확대된 것일 뿐이다. 아동은 아버지와 관계 맺기를 원하며, 어머니와의 관계에서처럼 만족스럽거나 만족스럽지 못한 관계를 경험한다. 아동은 만족스럽지 못한 아버지의 측면을 내면화하는데 그러한 측면들을 흥분시키는 대상, 거절하는 대상, 이상적 대상으로 나눈다. 이렇게 해서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발생한 한 무리의 내적 대상들과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발생한 또 한 무리의 내적 대상들이 존재하게 된다. 아동은 이 두 무리의 대상들을 결합시켜 흥분시키는 대상, 거절하는 대상, 이상적 대상을 만든다. 이렇게 해서 어머니와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복잡한 심리구조가 형성된다. 이제 아동은 흥분시키는 대상, 또는 거절하는 대상을 부모에게 투사하는데 대개 반대 성을 가진 부모는 유혹적인 흥분시키는 대상이 되고 동성의 부모는 방해하고 악의적이며 경쟁적인 거절하는 대상이 된다. 하지만 부모 중 누구를 흥분시키는 대상으로 선택하고 누구를 거절하는 대상으로 선택하느냐는 아동의 생물학적 성뿐만이 아니라 각각의 부모와 맺은 정서적 관계에 따라 결정된다.
아동은 두 부모와 보다 완전한 정서적 접촉을 원한다. 그러나 이러한 접촉은 아동에게 정서적인 지지를 해줄 수 없는 부모의 무능력에 의해, 그리고 부모와 접촉하고 싶은 자신의 욕구를 증오하는 아동의 적개심에 의해 방해를 받는다. 이러한 욕구들은 성화(sexualization)되어서 프로이트가 ‘오이디푸스적’이라고 부른 경험과 감정으로 나타난다. 페어베언은 유아처럼 의존하고 싶은 정서적 욕구가 때때로 성적인 것으로 경험된다고 말했다. 그것은 종종 부모의 유혹적인 면에 의해 자극된 일종의 방어이다. 이때 아동의 유아적인 의존 갈망은 조숙한 성기적 성으로 위장된다. 그러나 이러한 성화된 욕구가 진정으로 추구하는 것은 성적인 만족이 아니라 친밀한 접촉과 돌봄이다.

치료

페어베언은 자신의 이론이 임상적으로 어떤 함의가 있는가에 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치료 기법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은 그의 후기 저작에서이다. 그는 기법적인 중립성과 소위 “충동 심리학적” 해석이 결합될 경우 그것은 환자에게 거리감을 주며 사실을 왜곡할 수 있다고 우려하면서, 정신분석 과정을 “인격화(personalization)”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환자와 분석가의 관계가 결정적인 치료 요인이며, 통찰이나 발달적 재구성, 정화와 같은 여타의 치료요인도 여기에 달려있다고 보았다.
페어베언에 따르면 충동 심리학은 전이 해석에 대해 강조하는 정신분석 치료 이론과 조화되기 어려운데, 만일 충동이 일차적으로 중요하다면 전이 바깥에서 충동에 대해서 해석해 주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기 때문이다. 전이해석에 대한 강조는 대상관계 관점과 더 조화를 이룬다.
또한 치료 이론에서의 강조점은 아동기 외상을 발견하는데서 분석가와의 현재 관계를 분석하는데로 변화하였다. 이러한 변화가 함축하는 바는 환자의 저항은 무의식적인 과거에 대해서가 아니라 현재의 내적 현실에 대해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환자는 억압된 자아를 방어하면서 이러한 성격의 일부를 치료 상황에 가져오려는 치료자의 노력에 저항한다. 환자의 저항은 자신의 내적 현실을 분석가와 함께 접촉하려는 데 대한 방어이다. 즉, 환자가 궁극적으로 저항하는 바는 분석과정이 아니라 치료자이다.
마찬가지로 페어베언은 전이를 분석가를 자신의 내적 대상관계 세계로 데려가려는 환자의 노력이라고 보았다. 환자는 치료자를 자신의 내적 세계를 침범하는 위험스런 존재로 경험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내적 세계에 따라 분석가를 지각하고 경험한다. 이러한 전이와 저항에 대한 관점은 지금 여기에서 환자의 내적 대상관계 세계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전이에 치료초점을 맞출 것을 제안한다.
페어베언은 치료에서 전이가 담당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강조하면서도 정신분석의 치료적 작용은 전체 환자-치료자 관계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환자들이 초기 대상관계에서 유래하는 왜곡된 대상관계에 의해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해석만으로는, 그것이 전이에 초점을 둔 것이라고 할지라도, 이러한 내적 대상관계를 변화시킬 수 없다. 해석이 유익한 것은 “믿음이 가고 너그러운 부모 인물”과의 관계 속에서 행해질 때이다. 이러한 좋은 부모 인물은 내재화된 나쁜 대상을 파괴의 위협 없이 억압을 해체하고 방출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이러한 대상은 초기의 외상적 관계를 대체할 수 있는 만족스러운 대상관계를 제공할 수 있다. 즉, 분석가가 진정한 관심과 배려를 통해 전이에서 활성화되는 환자의 억압된 나쁜 대상관계를 능가할 수 있는 좋은 대상관계를 제공할 수 있을 때 치료효과가 나타난다.
페어베언은 “모든 사람에게 어느 정도 발생하는 그러나 다른 사람보다 어떤 사람에게 더 많이 일어나는 원시 자아의 삼중 분열”을 줄임으로써 성격을 통합해내는 것을 정신분석 치료의 일차적 목표로 꼽았다. 모든 내적 대상은 자아 구조이므로 그것들이 의식화 되면서 자아는 재통합되기 시작한다. 그는 변화에 대한 저항은 주로 내적 대상관계의 세계를 “폐쇄 체계”로 유지하려는 무의식적인 노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았다. 환자는 이 폐쇄 체계 속에서 환상과 꿈의 미묘한 표현을 통해서, 증상을 통해서, 외적 대상과의 관계를 회피하는 것을 통해서, 분열되고 억압된 나쁜 대상과 그에 상응하는 분열되고 억압된 자아 부분들간의 리비도적 연결을 유지하려고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페어베언은 환자가 분석가의 시선에서 벗어나 긴 의자에 누워야할 필요가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카우치 기법은 환자와 치료자의 개인적 관계 형성을 방해하며 오히려 합리화(rationalization)를 부추긴다고 보았다. 나중에 그는 환자와 분석가가 서로를 볼 수 있는 자리배치를 택하였다. 훗날 페어베언과 위니캇에게서 각각 분석을 받았던 건트립에 따르면, 이론적으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옹호하였던 위니캇이 기법에 있어서는 전혀 다른 토대에서 접근한 반면, 이론적으로 강력하게 반박한 페어베언은 오히려 기법에 있어서는 전통적 정신분석 - 일정한 거리를 취하고, 개인적인 깊은 관계를 맺지 않는 -을 고수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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