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변화를 목표로 하는 상담현장에서 늘 부딪치게 되는 문제이다. 사람들은 고통스러운 증상을 가지고 상담실을 두드린다. 상담이 진행되면서 증상 배후에 있는 자신의 문제를 서서히 깨닫기 시작한다. 그러나 어느 시점이 되면 거의 예외 없이 “그래서 어쩌란 말이지요?”라고 묻는 상황에 봉착한다. 내담자는 자신의 병리적 패턴과 그 결과를 알고 있고, 그것을 포기하길 원하고, 그럴 의향까지 있지만 전혀 변화하지 않는다. 마치 발을 헛디뎌 필사적으로 줄을 붙잡고 있는 암벽 등반가와도 같이 절대로 증상을 놓으려고 하지 않는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완강함을 치료에 대한 저항으로 기술하였다. 그리고 이 저항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치료의 관건이라고 보았다. 프로이트가 제안한 방법은 증상의 원인이 되는 갈등을 체계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내담자가 갈등을 이해하는데서 도움을 받지 못한다면 이해를 가로막는 “저항”을 해석하라. 그러나 이러한 전략은 너무나 자주 난관에 부딪친다. 내담자들은 자주 “문제가 뭔지 알겠지만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어요.”라고 반응한다. 해석만으로는 치료적 효과를 얻기 힘들다는 사실이 오랫동안 지적되어 왔고, 이 때문에 프로이트 자신도 치료 결과에 대해 비관적이었다. 프로이트는 “분석가는 신경증적 비참을 일상적인 불행으로 변형시킬 수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사실 사람들의 문제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가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 사람 입장에 서보면, 그의 내면 상황을 이해해보면, 그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것은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임을 알게 된다. 엄청난 손실을 감수하고 그런 행동을 유지하는 것은 그에게는 그게 최선이고, 그것 말고는 달리 행동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는 그러지 않으면 죽을 것 같기 때문에 온갖 증상을 만들고 병리적 패턴을 고집한다. 그런 사람에게 그러지 말라고 하는 것은 내담자 입장에서 볼 때 마치 암벽등반가에게 줄을 놓으라고 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이렇게 사람이 잘 변화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브롬버그(Bromberg, 1995)같은 이론가는 자기 연속성을 유지하려는 압력 때문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과거의 패턴을 되풀이하는 것은 친숙함을 선호하는 일종의 “정신의 보수적인 경향” 때문이다. 그러나 어째서 반복의 대가가 그렇게 큰 것일 때도 사람들은 과거의 패턴을 고집할까? 상담실을 찾는 사람들에게서 보는 병리적인 행동 패턴은 그 어느 것보다도 더 완강한 것처럼 보인다. 내담자가 커다란 고통을 느끼고 있고 변화시키고자 하는 바로 그 행동을 절대로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는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대상관계 이론이 심리치료 이론으로서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을 제공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 일 것이다. 대상관계 이론에서는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설명하는데, 이 둘은 서로 뗄 수 없이 관련되어 있다.
하나는 멜라니 클라인 학파에게서 보는 것처럼 대상의 측면에서 설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변화한다는 것은 속박되어 있던 대상에게서 놓여나는 것이다. 이것은 분리불안을 초래하고 이 때문에 변화가 어렵다. 내담자들은 흔히 변화의 순간에 “어머니(아버지)를 잃어버린 것 같다” “버림받은 고아 같다”는 느낌을 호소한다. 변화는 과거의 관계에서 떠나는 것이며, 이러한 관점에서 강조되는 것은 과거의 대상을 떠나보내는 것, 소위 “발달적인 애도”(Kavaler-Adler, 2003)과정이다.
또 다른 관점에서는 자기의 측면을 강조한다. 특히 위니캇 학파나 자기 심리학의 관점에서 볼 때, 사람들이 그토록 변화하기 어려운 이유는 변화하려는 시도가 과거의 존재방식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변화 과정에서 일종의 해체불안, 혹은 멸절불안에 처하게 된다. 이른바 비존재(none being) 경험을 한다는 것이다. 흔히 내담자들은 변화의 시점에서 “나를 잃어버린 것 같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망망대해에 떠있는 기분이다”는 식의 혼란스럽고 두려운 감정을 표현한다. 이 때문에 내담자들은 과거의 친숙한 패턴으로 되돌아가려는 유혹을 느낀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이 두 관점은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다. 이러한 두 관점의 관계는 페어베언의 정식으로 간단히 설명될 수 있는데, 그에 따르면 대상의 상실은 자기의 상실을 낳는다. 그 대상은 바로 자기를 규정하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옥덴(Ogden, 1994) 같은 사람은 이런 생각을 계승하여 나쁜 대상에 대한 애착이 자신에 대한 느낌을 보존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나쁜 대상일수록 대상에 대한 강한 애착을 갖는데 부정적인 관계 경험은 아이의 자기에 대한 느낌을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아이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none being)가 되기보다는 나쁜 사람이 되는 게 낫다. 이 때문에 나쁜 대상에게 집착하며 병리적인 패턴을 반복하는 것이다.
서머스(Summers, 1999)는 이러한 변화의 순간에 있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점들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아마 이를 ‘변화의 조건’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첫째, 변화과정에서 발생하는 분리불안과 해체불안을 담아줄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이러한 불안에 접촉하면서 이를 버텨줄 수 있는 안아주는 환경이 필요하다.
둘째, 변화의 순간은 새로운 자기가 출현하는 순간이다. 자기의 ‘자발적인 몸짓’이 나타날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이 필요하다. 관계에서 ‘형태 없음’을 허용하고, 머뭇거림을 기다려주고, 자발적인 몸짓에 민감하게 반응해줄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셋째, 자신에게서 아직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을 볼 수 있고 이 가능성을 촉진시킬 수 있는 관계를 형성해 줄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 뿐만 아니라 이제 막 싹트기 시작한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 이러한 두 개의 시선을 가지고 나와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변화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것은 천 길 낭떠러지 위에서 줄을 놓아버리는 것 같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임상현장에서 발견하는 것은 나를 잡아주고 있다고 믿는 것을 놓아버릴 때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삶을 지배하던 심리적 중력에서 벗어나 자유의 삶으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나를 지탱해준다고 믿었던 그것이 나를 얽매고 있는 것이었으며 보호해준다고 믿었던 바로 그것이 나를 죽음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이었다. 기억하시길. 가장 취약하다고 느끼는 그 순간이 바로 변화의 순간임을. 분리불안과 비존재의 현기증을 견뎌나갈 때 서서히 자유가 동터온다는 것을.(김석도)
참조
Bromberg(1995) Resistance, object-usage, and human relatedness, Contmp. Psychoanal., 31:173-191.
Kavaler-Adler(2003) Mourning. Spirituality and Psychic Change; A new object relations view of psychoanalysis, New York: Brunner-Routledge.
Ogden(1994) The concept of internal object relations. In: Fairbairn and the Origins of Object Relations Theory, ed. J. Grostein & D. Rinsley. London: Free Association Books, pp. 88-111.
Summers(1999) Transcending the Self: An Object Relations Model of Psychoanalytic Therapy, NJ; The Analytic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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